작성일 : 09-11-08 14:46
국내 '거미박사 1호' 김주필
 글쓴이 : happy
조회 : 772  

입력 : 2009.11.07 03:08 / 수정 : 2009.11.07 16:


40년 연구성과 25만마리… 거미박물관 동국대에 기증

1971년 서울대 실험실에서 고함이 들렸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거미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학원생 김주필(金胄弼·66)이었다. 며칠 전 지렁이를 연구하러 청계천에 들어갔다 죽을 뻔한 그였다. 자욱한 메탄가스 때문이었다. 그는 지렁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는 싫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게 거미였다. 거미는 지렁이만큼 환경오염을 잘 드러내는 지표종이다. "지렁이보다 연구분야도 넓고 무엇보다 국내에서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게 매력적이었죠."

그에게 거미는 '엘도라도'였다. 미친 듯 보낸 40여년 세월, 그가 바로 국내 거미박사 1호 김주필 동국대 명예교수다. 지난달 29일 그는 평생을 일궈온 '주필 거미박물관'을 동국대에 기증했다.

박물관에는 채집한 거미 5000여종, 25만여마리가 전시돼 있다. 일일이 이 거미들을 채집하고 모아온 그는 스스로를 "거미에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는 왜 하필 거미와 사랑에 빠졌을까.

김 교수가 만든 거미박물관에는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다.“ 우라나라에 독거미는 하나도 없어요. 만화나 영화 가 거미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든거죠.”그는 자식을 소개하듯 거미 예찬을 쏟아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황해도가 고향인 김 교수는 6·25 때 월남했다. 가난이 싫어 돈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려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당시 서울대 동물학과 교수였던 강영선 박사였다. 강 박사는 동물학계의 대부(代父)로 통했다. "12년간 강 박사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어요. 벌레와 식물 이름을 많이 아는 저를 눈여겨본 거지요. 상대에 진학한다고 했더니 눈앞에서 원서를 찢어버리고 동물학과를 지원하라고 하더군요."

반강제로 동물학과에 진학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바로 자기 적성이었다. 그는 "동물연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부족한 학비는 종로 학원가를 뛰며 벌었다.

수강생들이 인산인해였다. 대학원을 마친 1976년에는 아예 학원을 인수했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때 돈을 엄청 벌었죠. 거의 한달에 집 한 채씩 벌었다니까요. 거미박물관도 다 그 돈으로 지은 겁니다."

학 원 경영이 지겨워질 때쯤 학업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는 1981년 미련없이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김 교수의 거미연구가 시작됐다. 그가 최초로 발견한 것은 한국땅거미다. 1983년 당시 한국에는 땅거미가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학자들은 "한국에는 청정지역에만 사는 땅거미가 없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오기가 생긴 김 교수는 땅거미의 모습과 사는 곳을 그린 전단물을 곳곳에 뿌렸다.

"그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무조건 5만원을 주겠다고 현상금도 내걸었습니다. 당시 5만원은 지금의 50만원쯤 되는 돈이었습니다." '공개수배'된 땅거미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발견됐다.

김 교수는 "그때의 희열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1985년 한국땅거미를 발표하고 발견 장소에 세계 최초로 거미연구소를 세웠다. 그곳이 현재 거미박물관이 자리잡은 곳이다. 그는 주말이면 거미를 찾아 전국을 누볐다. 밤에 산에서 랜턴을 켜고 거미를 잡다 간첩으로 몰린 것도 부지기수다. 해외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내가 가기만 하면 그 나라 거미를 초토화시킨다고 공항에서부터 감시가 심해요. 한번 해외에 나가면 두 달 정도 여러 나라를 돌며 500여 마리 정도를 잡아오죠. 보호종도 몰래 잡아와요. 절대 뺏길 수 없죠. 허허."

김주필 교수는 "박사모가 박근혜 의원에게 사준 방탄복도 미국에서 거미줄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사진에서 빨간색 원형으로 표시된 것이 방탄복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 출장은 1993년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한 때다. 김 교수가 갈라파고스를 방문하자마자 환경보호 단체 관계자 2명이 그를 따라붙었다. 그는 관광하러 왔다고 거짓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대신 꼬마들을 이용했다. 지역 주민이 잡는 거미는 적발되지 않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숙소에서 아이들에게 '거미 잡아오면 줄게'하며 달러를 흔들었어요. 그렇게 잡은 거미가 200마리는 넘을 겁니다." 그렇게 확보한 거미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물리기도 했다. 1991년 미국 미시시피강에 갔을 때다.

" 보호종인 검은과부거미를 못 가져가게 해 일부러 물렸어요. 사람들이 치료하다가 '거미는 어떻게 했냐'고 묻길래 버렸다고 하니 믿더라고요. 그래서 몰래 가져왔어요. 위험한 거미로 알려졌지만 의외로 죽을 확률은 낮거든요." 그는 '밀수의 달인' '거미계의 문익점'으로 통한다. 그는 "공항에서 걸리지 않는 비법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갈라파고스에서 잡은 거미를 넣은 병에 미시시피강에서 잡았다고 거짓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연구목적으로 잡았다고 하면 통과가 된다"며 "이중 장부를 작성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가 모은 거미가 25만여 마리, 최초로 발견한 거미만도 140여 종이다. 그는 왜 거미에 미쳤을까. 김 교수는 "거미는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益蟲)"이라고 했다. 늑대거미, 게거미 등을 이용해 농약 없이도 벼멸구나 매미충 같은 해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거미 독과 소화효소로는 마취제나 소화제를 만들 수도 있다. 그는 "거미줄을 이용해 신소재 옷감을 만들 수 있고 미사일 방어막도 만든다"며 "박사모가 박근혜 의원에게 사준 방탄복도 미국에서 거미줄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