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0-06 13:56
벽암록을 불태우다 노태맹 시집
 글쓴이 : happy
조회 : 15  

저자 노태맹|삶창 |2016.05.11

벽암록을 불태우다


삶창시선 제45권 『벽암록을 불태우다』의 저자 시인 노태맹은 「벽암록을 읽다」 연작을 스무 편 쓰고 『벽암록을 불태우다』를 썼고, 그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을 만나면 그와 함께 살고/죽은 것들을 만나면 그와 함께 죽습니다.” 이 언술은 관념과 행동이라는 이분법을 그가 넘어서려는 모험 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벽암록을 불태우다」는 이렇게 끝난다.


저자 : 노태맹
저자 노태맹은 1990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 『푸른 염소를 부르다』가 있다.


목차

시인의 말_5

碧巖錄을 읽다 1_10
碧巖錄을 읽다 2_12
碧巖錄을 읽다 3_15
碧巖錄을 읽다 4_18
碧巖錄을 읽다 5_20
碧巖錄을 읽다 6_24
碧巖錄을 읽다 7_27
碧巖錄을 읽다 8_30
碧巖錄을 읽다 9_33
碧巖錄을 읽다 10_35
碧巖錄을 읽다 11_38
碧巖錄을 읽다 12_41
碧巖錄을 읽다 13_44
碧巖錄을 읽다 14_47
碧巖錄을 읽다 15_50
碧巖錄을 읽다 16_53
碧巖錄을 읽다 17_56
碧巖錄을 읽다 18_59
碧巖錄을 읽다 19_62
碧巖錄을 읽다 20_66
碧巖錄을 불태우다_69
가을바람이 모든 것을 드러내다_72
나는 이 꽃들을 모른다_74
햇살이 팽이처럼 돌고 있다_78
붉은 사막을 지나온 낙타처럼_80
산정묘지에 서다_83
바닷속에 잠겨 있는 붉은 회화나무처럼_86
江을 옹호하다_88
흰 나비 도로를 가로지르고_90
오히려 인식하라_92
흑백 사진을 벽에 걸다_94
가을 숲 속에 그가 있다_96
백일홍나무 아래 붉은 강이 흐르다_98
어느새 꽃들 사라지고_100
붉은 꽃을 들다_102
사랑 노래를 부르다_105


산문_碧巖錄을 읽다 _109


<출판사 서평>

그러나 앞서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시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직한 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옳지 않다. 보이 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는 소통이 아니라 폭력에 가깝다. 존재하지 않던, 보이지 않던 힘들이 독자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과거의 예언자들이나 사제들처럼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 하나를 던져준다.

_시인의 산문 「碧巖錄을 불태우다」 중에서



그렇다, 시는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다!

노태맹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벽암록』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게송이기도 하고, 익살이기도 하고, ‘깨달음’이라는 도그마에 대한 주장자(柱杖子)이기도 한 『벽암록』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모호한 텍스트이다.

노태맹 시인이 그 『벽암록』을 읽으면서 시집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은유이다. 어떤 은유? 바로 우리가 사는 화탕지옥에 대한 은유. 아니 화탕지옥을 살아가는 시인 노태맹 자신에 대한 은유. 『벽암록』을 옮겨놓은 듯한 시들을 쓰면서 시인의 내면에서 무엇이 들끓고 있는지 알아채기에는 그래서 쉽지 않다.

시인은, 시집 뒷표지에 통상 있게 마련인 ‘추천사’나 혹은 시인 자신의 군말을 빼고 “시는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이다”라고 단 한 문장만 박아놓았다. 이 문장은 또다시 ‘해설’이나 ‘발문’ 대신 실은 시인 자신의 아포리즘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이 들어간 아포리즘 앞에는 이런 구절이 배치되어 있다. 시인은 “과거의 예언자들이나 사제들처럼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 하나를 던져준다.”

「벽암록을 읽다」 연작을 읽기 전에 이러한 시인의 인식을 염두에 두는 것이 노태맹 시인의 시에 다가가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벽암록을 읽다」가 단지 『벽암록』에 대한 독후감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뒤엉킨 패치워크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예컨대, 「벽암록을 읽다 3」에는 마치 게송을 읊는 듯하다가 정리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통째로 편집해 넣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지긋지긋하다,고 20년 전에 썼는데/이제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나 늙어가고 있는가?” 물론 여기서 “말해보라, 이것이 무슨 시절인가?”라는 물음이 없다면 이 시는 그저 시인의 넋두리로 오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벽암록을 읽다 8」을 보면 “碧巖錄 68페이지까지 읽다가 접어두고/김수영(1921~1968) 「그 방을 생각하며」를 펴 들었다.”라는 진술이 나오고 그 다음은 「그 방을 생각하며」를 패러디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선문답이다. 독자들은 이런 시의 구조를 두고 “노회한 구조주의자라고 욕을 한 세 바가지는” 할지 모르겠지만 연작 시편에는 시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시인은 시가 남기고 간 흔적일 뿐이다

그런데 독자는 이런 패치워크를 시인이 왜 짜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벽암록을 읽다」 연작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이 연작을 통해서 자신의 혼란스런 관념을 노출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혁명, 삶, 시, 그리고 시간에 대한 것까지. 다시 말하면 노태맹은 「벽암록을 읽다」 연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에서 정치의식까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벽암록』은 사실 어떤 도그마를 향한 치열한 물음덩어리이다. 그래서 『벽암록』에 등장하는 선승들은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주장자로 대갈통을 갈긴다. 혹 시인은 벽암록의 이런 정신(?)을 차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들뢰즈의 언명,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를 동원하는 것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이러한 일종의 관념의 반복이 행동으로 화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벽암록을 읽다」 연작을 스무 편 쓰고 「벽암록을 불태우다」를 썼고, 그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을 만나면 그와 함께 살고/죽은 것들을 만나면 그와 함께 죽습니다.” 이 언술은 관념과 행동이라는 이분법을 그가 넘어서려는 모험 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벽암록을 불태우다」는 이렇게 끝난다.

아무것도 읽을 것이 없을 때
검게 타버린 네 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라!

아무것도 두드리며 노래할 것이 없을 때
검게 타버린 저 둥근 허공을 두드리며 노래하라!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을 때
불 타 부서져 흘러내리는 네 옆의 사람을 기억하라!

시인이 관념과 행동이라는 이분법에 도전하는 것이 맞다면, 「백일홍나무 아래 붉은 강이 흐른다」라는 시에 등장하는 이런 구절은 더욱 의미심장한 울림을 준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나를 감싼 옷과 같지만/어쩌겠는가, 내 이제 이 붉은 꽃의 모든 어리석음과 화해하련다.//사랑이여, 사랑이여 백 일을 붉었다.//그리하여 나 또 천 일을 어리석게 붉을 것이다.” 이 시는 자본의 폭력에 맞서 408일을 스타케미컬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차광호에게 준 시이며, 그래서 부제는 ‘굴뚝 위의 노동자 차광호를 위하여’이다.

노태맹은 그가 사는 대구 지역의 소리 없는 활동가이다. 그러나 그는 시에 있어서는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적 양식을 거부한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 허튼 소통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라는 시에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빌어온 다음 “시가 남지 않고 시인이 남는다면 나에겐 모욕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인들의 존재 양태를 겨냥한 것이다. 그에게 오늘날 “시인은 인식하지 않는다.” 시인이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소통을 원하는 것과 현실을 괄호 친 기호들의 난무를 노태맹은 동시에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인식을 통해 이미지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는 소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즘에서 아감벤을 빌어 말하듯이,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시인이 이미지로 소통을 꾀하는 정치는 그에게는 위험해 보인다. “이미지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시인들은 혹은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 시인이 시를 벗어나는 순간, 그는 그저 거품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에는 그런 노태맹 시인의 고집이 배어 있는 것이다.

시의 정치!
그것은 세상에 “불덩어리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게 시인이 『벽암록』을 읽고 그것마저 태워버리는 속뜻이다.


<책 속으로>

1.
―무엇이 詩입니까?
―詩이다.
―무엇이 아름다움입니까?
―아름다움이다.
―이 가을의 슬픔은 어디에서 옵니까?
―거기서 다시 걸어와 보거라.
―길이 끊어진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끊어진 적이 없다.
―모두가 벼랑 끝에 몰려 있습니다.
―그럼 자물쇠로 열어라.
―밤이 끝나면 죽은 자들도 일어설 수 있습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날 밝거든 가거라.

2.
나무 그림자
검은 고양이처럼 휙 지나간다.
온종일
늦가을 바람에 넋이 나간
머리 위 느티나무
붉은 달이 간신히 붙들고 있다.
이제
죽어도 좋을 때라는 생각 자꾸 드나보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듯 밟히는
담벼락 아래 낙엽들.

3.
詩는 무덤.
무덤 속에 누워 다시 푸른 바위를 읽다.
한 생각이 만 년이면 만 년도 한 생각이겠네.
지긋지긋하지만도 않겠는데?

---「碧巖錄을 읽다 13」 전문


아직 붉다.
백일홍꽃들을 겹겹이 감싼 시간의 손들이
꼼꼼히 붉음을 덜어내고 있는 동안에도

아직 사랑은 붉다.
아직 사랑은 붉다.

푸른 숲이 산꼭대기에 구름을 내려놓고 온 바람들과
저 나부끼는 허공의 깃발을 꿈꾸는 동안에도

사랑은 그림자조차 붉다.
이 굴뚝 위에서조차 붉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나를 감싼 옷과 같지만
어쩌겠는가, 내 이제 이 붉은 꽃의 모든 어리석음과 화해하련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백 일을 붉었다.

그리하여 나 또 천 일을 어리석게 붉을 것이다.

백일홍나무 아래 붉은 강이 흐르고,
우리 사랑은 그렇게 긴 강의 기억과 같으리니

내가 없는 이 자리도
붉다, 아직 어리석게 붉을 것이다.

아, 아직 우리의 사랑은 붉다.
아직 우리의 사랑은 붉다. 
---「백일홍나무 아래 붉은 강이 흐르다-굴뚝 위의 노동자 차광호를 위하여」 전문